[비즈체크=서동석 수행문화전문가] 우리는 뭔가를 소유하기 위해 평생 애쓰며 살고 있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 우리는 두 주먹을 꼭 쥐고 태어난다. 인간은 나와 남을 분별하고, 내 것을 쟁취하려는 본능을 죽을 때까지 놓지 못하는 습성을 타고났다. 이러한 생명의 특성 때문에, 생명이 붙어있는 동안 외부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으면, 늘 갈등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임종에 이르러서는 일생동안 집착하며 붙든 것들을 놓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의 갈등을 조화롭게 풀기 위해서는, 인간의 의식을 근본적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자연은 거대한 순환시스템에 의해 생태적 균형이 조율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의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의 순환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그런데 인간의 몸부림은 오히려 삶의 환경을 더욱 악화시키는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마치 늪에 빠졌을 때, 살자고 허둥대면 그럴수록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과 같다. 늪에서 빠져나오는 방법과 인간사회의 모순과 갈등을 헤치고 나오는 방법은 비슷하다.
늪에 빠졌을 때 주변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이나 사람이 있다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만약 아무 것에도 의지할 수 없다면, 가능한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현명하다. 이때 소중히 여기는 뭔가에 집착한다면, 가장 귀중한 생명을 잃을 수 있다. 따라서 무소유의 상태로 돌아가 일체의 힘을 빼고, 몸을 엎드려 늪과 수평을 유지해야 한다. 그리고 개구리처럼 손과 다리를 자연스럽게 유영하듯이 움직여 늪을 빠져나오면, 자신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동일한 이치가 인간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에도 적용된다. 사회 갈등을 중재할 수 있는 인재들이 곳곳에 있다면, 사회의 안정은 빠르게 회복된다. 그러나 양극화가 심한 사회에서는 대립하는 양측의 분쟁을 해소하기 힘들다. 특히 중도층이 약한 상태에서는, 아마도 극한 상황까지 대립이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 이때 사회를 살리는 유일한 길은 성인(聖人)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한 무소유의 정신을 일깨우는 길밖에 없다.
공자는 《논어》 〈학이편〉에서 “군자는 먹는 데 있어서 배부름을 구하지 않으며, 거처함에 있어서 편안함을 구하지 않는다(君子食無求飽, 居無求安).”고 경책의 말씀을 했다. 노자도 같은 맥락에서 《도덕경》 12장에서 “얻기 어려운 재물은 사람을 방만하게 만든다(難得之貨 令人行妨).”고 말씀했다. 석가는 진리를 추구하는 수행자에게 두타행(頭陀行)을 강조했다. 두타행은 일체의 세속적인 편안함을 버리고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도 〈누가복음〉 9장 3절에서 같은 의미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했다. “길을 떠날 때 아무것도 지니지 마라. 지팡이나 식량자루나 빵이나 돈은 물론, 여벌이나 내의도 가지고 다니지 마라.” 집착과 소유욕이 진리의 눈을 가리기 때문에, 성인들은 공통적으로 무소유의 수행을 실천했다.
에머슨의 시(詩) 중에서 〈하마트레이아(Hamatreya)〉는 인간의 소유욕을 실질적으로 통찰하고 있다. 이 시는 고대 인도의 왕들과 초기 식민지 시대의 양키 대농부들을 비교하면서, 거대한 토지를 소유한 인간이 지닌 탐욕과 야망이 얼마나 헛된지를 잘 보여준다. 이 시의 결론 부분에 있는 ‘대지의 노래(Earth-Song)’는 인간의 무지를 깨우친다. “그들은 나를 그들 것이라 부르고,/ 그렇게 나를 통제했지./ 하지만 누구나/ 지속하기를 바랐지만, 이제는 사라지고 없다네.” 대지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은 세상을 소유할 수 없고, 잠시 관리하다 사라질 뿐이다. 온갖 권세와 오만을 부리는 인간은 결국 땅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인간의 지나친 소유의식은 사회의 갈등을 유발하는 가장 큰 원인이다. 여기서 우리가 갖고자 하는 것들의 실상을 과학적으로 통찰해보자. 천체물리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주 공간에서 우리가 물질로 인식하는 것은 4% 정도밖에 안 된다. 나머지는 허공에 해당하는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다. 아주 작은 부분에 해당하는 우주의 물질 속에서, 우리가 차지하는 지구의 일부분은 티끌 속의 티끌도 안 된다. 반대로 미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모든 물질은 원자 단위로 쪼갤 수 있다. 그런데 원자의 내부는 99%가 텅 비어있는 구조를 이루고 있다. 사실상 소유할 수 없는 것을 두고 우리는 서로 싸우고 있으니, 얼마나 허망한가!
한편 세상은 수많은 존재의 사슬로 연결되어 있다. 대동사회(大同社會)를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는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의식을 버려야 한다. 작은 일은 나 혼자 가능할지 몰라도, 큰일은 다른 사람들과 협력해야 가능하다. 서로 주고받는 것이 상황에 맞게 조율되면, 진실한 협력이 이루어질 수 있다. 여기서 더 본원적으로 통찰하면, 내가 원하는 일을 이루는 원동력은 내가 의식할 수 없는 존재들의 도움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심지어 적대관계를 이루는 사람들도 서로 보상관계를 이루며, 서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상대의 존재를 강화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할까? 중요한 것은 생명작용의 법칙이다. 거대한 생명의 순환에 방해가 되는 존재는 언제나 가차없이 제거되는 법이다. 상생상극(相生相剋)은 생태적 균형을 유지하는 자연의 법칙이자, 인간사회를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원리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노자는 “공이 다하면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법도다(功遂身退, 天之道也).”라고 말씀했다. 자신의 역할을 다하면, 물러나서 새로운 단계로 넘어갈 준비를 하는 것이 현명하다. 인간이 추구해야 할 최후의, 최고의 단계는 진리의 수행이다.
진리는 허공에 비유할 수 있다. 허공은 차별 없이 모든 존재를 포용한다. 또한 허공은 누군가가 사유(私有)할 수 없다. 진리도 마찬가지다. 위없는 진리는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혜택을 주고, 만사만물을 아우른다. 따라서 진리는 관념적 사상이나 형체를 이룬 물건처럼 누군가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 지금까지 어떤 사상도 인류를 구원할 수 없었던 것은 인류가 소유의 관점에서 특정 사상을 세상에 적용하려 했기 때문이다. 모든 경계를 넘어 믿을 수 있는 사상은 진리다. 그러나 보편적 사상도 특정한 무리들만이 믿을 수밖에 없게 만든다면, 그것은 이념에 불과하게 된다.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근원적 처방은 세상을 소유가 아닌 관리의 대상으로 보는 데 있다. 바른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함부로 소유하는 재산이나 권력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와 같다. 도리에 맞게 관리하는 정신으로 세상을 경영할 때,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방향으로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 우리가 진리를 추구하는 수행정신을 다시 회복하고 후손에게 물려준다면, 우리 사회는 세상의 등불이 될 것이다. 수행정신만이 AI시대의 마지막 희망이다.
수행문화전문가 = 서동석 박사 eastosuh@daum.net
고려대학교 대학원 영문학과를 졸업(문학박사)했고, 현재 에머슨하우스 교육연구소 소장이다. 서남대학교 영문학과 교수, (재)대상문화재단 이사 겸 동천불교문화재단 상임이사 겸 반야연구소 소장, 고려대학교, 광운대학교, 단국대학교 강사 등을 역임했다. AI시대 융합문명사회를 준비하는 차원에서 인간교육과 수행에 관한 집필, 연구개발과 더불어 수행건강교육문화 보급에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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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변하는 시대에는 공공기관, 기업 등에서 대표와 임직원의 바른 인식전환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1)AI시대 어떻게 살 것인가, 2)수행과 건강한 삶, 3)건전한 기업정신문화, 4)초융합사회의 인간교육, 5)자녀리스크 관리 등에 관한 단체 강의, 개별 컨설팅, 그리고 단계적인 균형조율프로그램을 선택적으로 진행합니다. 이메일(eastosuh@daum.net)로 예약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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