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체크=서동석 수행문화전문가] 한 해가 저물고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것은 자연의 당연한 섭리이지만,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분위기는 사회의 상황에 따라서 매우 다르다. 특히 2024년의 말미에서 송구영신의 의미는 우리에게 특별하다. 우리는 지금 문명대전환의 혼란기에 살고 있다. 외부 요인들이 변화의 격랑 속에 있는 와중에서, 설상가상으로 우리는 내부적으로도 정치, 경제 등 모든 영역에서 큰 시련을 맞이하고 있다. 변화는 늘 새로운 위기를 동반하지만, 지금의 변화는 모든 악조건이 하나로 응집되어 대폭발을 앞두고 있는 최악의 상황이다. 현상의 변화이치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역(易)에서, 대위기의 상황을 대기회의 전기로 삼는 지혜를 찾아보자.
본질적으로 보면,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아무리 큰 변화도 우주의 거대한 흐름을 막을 수 없는 티끌 같은 미미한 움직임에 불과하다. 그러나 현상적 측면에서 보면, 우리에게 현재 닥치고 있는 변화는 절체절명의 기로에서 선택을 강요하고 있는 엄청난 충격이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주역은 무엇을 선택하기보다는, 바른 이치를 추구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역(易)은 음양의 변화를 통해 세상의 흐름을 설명하고 있다. 양(陽)을 대표하는 중천건(重天乾)과 음(陰)을 대표하는 중지곤(重地坤)에서, 변화에 대처하는 마음가짐을 알려주는 대목이 있다.
먼저 중천건 용구(用九)에, “뭇 용이 머리를 감추니, 길하다(見群龍无首, 吉).”는 내용이 나온다. 용구는 중천건의 특별한 효(爻)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양(陽)의 본질적 의미와 활용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뭇 용(群龍)’은 미래사회를 이끌어갈 각계각층의 지도자를 의미한다. 여기서 핵심은 ‘무수(无首)’라는 말이다. 이 말의 뜻을 자세히 음미해 보면, 변화를 대하는 바른 마음자세를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첫째, 앞에 나서지 않고 일을 처리하는 것이 순리다. 이 해석은 노자가 《도덕경(道德經)》에서 삶의 원칙으로 내세운 세 가지 원칙 중의 하나인, “감히 세상사람 앞에 먼저 나서지 않는다(不敢為天下先).”는 말씀과 통한다. 크게 되려는 사람은 낮은 곳에 처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이치를 담고 있다.
둘째, 관념적 사고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세상을 바르게 볼 수 있다. 세상은 관념으로 존재한다. 우리가 상대하는 모든 대상에는 우리의 관념이 투영되어 있다. 사람마다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에, 옳고 그름에 관한 판단기준이 서로 다를 수 있다. 서로가 다른 관점으로 대치하면, 끝없는 갈등을 야기할 뿐이다. 편견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상대를 바라볼 때, 개인과 사회의 안정적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 객관성을 기르는 제일 좋은 방법은 자기중심적인 분별과 감정을 배제하고, 제3자의 입장에서 자신과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훈련이다.
셋째, 변화의 방향은 정해져 있지 않다. 변화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대세를 따라간다. 변화를 주도하고자 하는 세력들 사이에서 상호작용의 결과에 따라 변화의 방향은 달라진다. 물질과 정신의 융합이 미래사회의 화두이지만,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구현될지는 아무도 예단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변화흐름의 양면인 작용과 반작용을 동시에 고려하고, 도리에 맞게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의 자세로, 미래를 대비하며 현재를 성실하게 사는 것이 최선이다.
넷째, 음양의 율려작용(律呂作用)은 자연스런 생명현상이다. 모든 자연현상은 음양, 즉 생명력의 발산과 수렴의 양극단으로 나뉘어, 서로 갈등하는 과정을 거쳐 중화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나와 상대하는 편은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묘하게도 내 적이 나를 살리는 보호막인 셈이다. 같은 맥락에서,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은 산문 〈보상〉에서 “비난이 칭찬보다 안전하다.”는 말을 했다. 증오는 상대의 세력을 더욱 키울 뿐이다. 상대가 진실로 잘못되었다면, 상대의 행태를 반면교사로 삼아 나의 도리를 찾는 것이 최상의 길이다.
한편 음(陰)이 대표하는 의미는 중지곤 용육(用六)에서 볼 수 있다. 공자는 용육에 대한 해설에서, “상사에서 이르기를, 용육으로 영원히 올곧으면, 위대하게 끝맺게 된다(象曰, 用六永貞, 以大終也).”고 말씀했다. 용육은 ‘올곧음(貞)’의 도리와 그 결과를 암시한다. 첫째, 올곧음은 변화의 위험 속에서도 바름을 지켜나가는 도리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지만, 올곧은 도리는 영원히 존재한다. 도리에 어긋난 세력들이 세상을 소유할 것 같지만, 결국 세상은 바른 도리를 따르는 쪽으로 선회하기 마련이다.
둘째, 올곧음은 변화의 흐름을 따른다. 지금 세상은 AI가 주도하는 변혁의 시기에 있다. 인류문명은 폐쇄적인 물질문명사회에서 개방적인 융합문명사회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AI가 정보통신기술, 양자물리학, 심신의학 등과 같은 첨단과학기술에 적용되어 이러한 변화를 가속화하고 있다. 선진국은 이미 문명의 대전환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는데, 우리가 작은 밥그릇 싸움 때문에 서로 미워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는 선진국 문턱을 넘어가지도 못하고, 대세의 흐름에서 낙오될 수 있다. 우리가 살길은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바른 도리를 회복하는 수밖에 없다.
셋째, 올곧음은 곧 중정(中正)의 이치다. 중정이란 중도(中道)와 정도(正道)를 함께 일컫는 말이다. 그 뜻은 앞서 언급한 자연 현상으로서 음양의 율려작용과 일치하고, 정신문화로서 바른 도덕을 의미한다. 지금은 AI가 물질문명을 극단으로 몰고 가고 있다. 그러나 물질이 극에 이르면, 반드시 물질과 정신의 지나친 불균형에 대항하는 반작용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때 인간이 물질문화에 걸맞은 정신문화를 확립하지 못하면, 물질이 인간의 주인이 되는 주객전도의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변화에도 도리가 있고, 바른 도리에 역행하면 인류는 살아남기 힘들다.
넷째, 올곧음은 변화에 따른 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다. 변화의 3요소인 천지인(天地人), 즉 시간과 공간과 사람의 관계는 모두 시작하는 대로 끝나고, 끝나는 대로 다시 시작한다. 역의 시간관념은 시종(始終)이 아니라, 종시(終始)다. 이러한 이치로 ‘위대한 끝맺음(大終)’은 ‘위대한 시작(大始)’를 낳는다. 중점은 끊임없는 생명활동의 연속에 있다. 다만 3요소의 관계가 균형을 유지하는 정도는 종시(終始)와 성패(成敗)의 대소(大小)를 좌우할 따름이다. 바른 도리는 끝과 시작을 단단하게 맺어주는 역할을 한다.
역(易)이 주는 교훈은 결국 양극적 대상에 걸림 없는 지혜가 대변혁의 시기를 밝히는 등불임을 알려주고 있다. 바른 지혜는 우리 모두가 하나의 생명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자각에서 싹튼다. 미움과 편견은 우리 자신을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들 뿐이다. 바른 도리에 대한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다. 모든 성인(聖人)은 표현을 달리 했을 뿐 공통적으로 중정(中正)의 도리를 말씀했다. 모든 존재를 감싸는 하나의 생명의식으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고, 힘차게 새날을 맞이하자.
수행문화전문가 = 서동석 박사 eastosuh@daum.net
고려대학교 대학원 영문학과를 졸업(문학박사)했고, 현재 에머슨하우스 교육연구소 소장이다. 서남대학교 영문학과 교수, (재)대상문화재단 이사 겸 동천불교문화재단 상임이사 겸 반야연구소 소장, 고려대학교, 광운대학교, 단국대학교 강사 등을 역임했다. AI시대 융합문명사회를 준비하는 차원에서 인간교육과 수행에 관한 집필, 연구개발과 더불어 수행건강교육문화 보급에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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