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체크 = 박용설 역사 칼럼니스트]

1926년 8월4일 밤.

검은 바다위로 달빛이 흔들렸다.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관부연락선 갑판.

한 남자와 한 여자는 나란히 서 있었다. 여자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남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바다는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출렁 거렸다.

“이제, 가야겠지?”

여자는 조용히 물었다.

남자는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다음 순간 물살이 갈라지고 두 사람은 서로 꼭 껴안은채 어둡고 깊은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윤심덕은 1897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다재다능 했다. 경성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천재만 뽑힌다는 조선총독부 국비 유학생으로 뽑혀 일본 최고 명문 도쿄음악학교(현 도쿄예술대학)에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윤심덕은 도쿄음대 최초의 조선여학생 이었다. 그녀는 졸업후 성악가로서 명성을 쌓았고 특히 한국 가곡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 성악가.’의 현실은 냉혹했다.

신출내기 가난한 예술가 에게는 후원자가 없었다.

특히 클래식 시장이 형편없는 조선에서는 무대 조차 흔치 않았다.

그녀는 일본을 오가며 대중가요와 연극배우로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김우진은 1897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목포에서 소문난 갑부였다. 집안은 조선의 내로라하는 유지들로 가득했다.

김우진은 명석한 머리로 항상 전교일등이었고 수재만 들어간다는 일본 최고 사립 명문 와세다대학교 영문과에서 공부하며 취미로 희곡을 쓰고 연극에 관심이 많은 부자집 도련님이었다.

두 사람은 조선 최고의 엘리트였다.

윤심덕은 활달한 성격이라 도쿄의 남자 유학생들과 잘 어울렸다. 키가 크고 목 이긴 서구형 미모에 자신감 넘치는 성격은 유학생 사이에선 단연 최고 인기를 구가하였다.

1921년 동경 유학생들이 기획한 조선 순회공연에 성악가로 참여 했다가 김우진을 만난다.


천재와 수재의 만남은 단순했다.

“당신 노래를 듣고 있으니 제 희곡 속 인물이 살아난 것 같습니다.”

“그럼, 제 노래에 당신 이야기를 실어 줄수 있겠어요?”

그건 시작이었다. 운명은 조그만 불장난에서 시작 되었다.

그날 이후 둘은 매일 밤 문학과 예술, 삶과 사랑을 이야기 했다.

만나면 만날수록 그들의 마음도 깊어졌다. 하지만 그럴수록 현실의 벽은 높게만 느껴졌다.

김우진은 가정을 두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조선에 있었고, 아이도 있었다.

윤심덕도 알게 되었지만 그들은 이미 서로를 포기 할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철없는 금지된 사랑은 절망적 현실앞에 더욱 더 처절하고 안타깝게 깊어만 가고 있었다.

그들은 일본과 조선을 오가며 사랑을 나누고 점점 깊은 사랑의 수렁으로 빠져 들어갔다.

함께 시를 읽고, 희곡을 쓰며 세상을 논했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몰래 사랑을 언제까지나 계속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린 무슨 방법이 없을까?”

김우진이 말했다.

“무슨 방법을 찾아야지...”

윤심덕이 속삭였다.

절망적 상황에서 버릇같이 되뇌이는 말이었다.

그녀는 레코딩 스튜디오를 향했다.

<사의 찬미>를 녹음하며 그녀의 목소리는 더욱 깊고 애절하였다.

“광막한 황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곳 그 어데냐...”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인생이 어디를 가야 할지를.

그들은 도망 칠수 있었다.

조선에서든 일본에서든 새로운 삶을 시작 할수가 있었다.

이혼도 가능했다.

김우진은 부유한 집안이기에 살아가는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왜?

김우진의 현실은 감옥 이었다. 완고한 아버지의 엄청난 기대와

장손에 대한 가문의 기대에 갇혀 꼼짝 할수 없었다. 부유했지만 자유롭지 못했고

운신의 폭이 너무 협소했다.

아내와 이혼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집안의 모든 관계를 모두 부정하는 일이었다.

윤심덕을 사랑하면 사랑 할수록

이 모든 것들이 그의 목을 점차 조여오고 있었다.

이러지고 저러지도 못하는 현실에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윤심덕에게도 현실은 절망 이었다.

그녀의 노래 실력이 출중하여 관중을 매료시켰지만 돈벌이는 시원치 않았다.

연극배우까지 하며 안간힘을 써보지만 뾰족한 방법은 없었다.

노래를 하고 싶어도 클래식 무대는 없었고 생계형 구차한 무대 뿐이었다.

결국 그들은 현실에서 버틸 재간이 없었다.

곱게 자란 부자집 도련님은 현실을 박차고 나갈 용기도 부족하였다.

윤심덕과 김우진이 투신한 徳寿丸호

그들은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관부 연락선에 올랐다.

그날밤 선실에서 두사람은 아무 말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무섭지 않아?”

윤심덕이 물었다.

김우진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연극의 마지막 장면, 난 항상 엔딩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

그는 웃었다. 그의 절망적 상황에서 유일한 탈출구로 가는.......

새벽이 되자 그들은 갑판으로 나갔다.

윤심덕과 김우진은 손을 잡았다.

그윽하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서로를 응시하며, 마치 무대위에서 마지막 대사를 하듯

“이제 가야지......”

“그래.........”

그리고 그들은 바다로 뛰어 들어 꽃다운 생을 마감한다, 동갑내기 29세.....

배가 부산에 도착했을 때 갑판위에 덩그러니 남겨진 윤심덕의 구두 한 켤레가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신문에는 “금지된 사랑의 결말”이라는 기사로 쓰여졌고, 사람들은 <사의 찬미>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윤심덕의 레코드는 그녀 사후에 무려 10만장이 팔리는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철없는 불장난 처럼 시작한 5년간의 ‘금지된 사랑.’

그 사랑의 대가는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박용설 역사 칼럼니스트 finder5300@hanmail.net

금융회사에 30년간 근무하고 마라톤을 뛰고 있다.

로마사에 흠뻑 빠져 관련책을 섭렵하고 있으며 고대로마의 역사현장에 가서 배우기 위해 로마와 그리스등에서 직접 ‘한달살기’ 체험을 하면서 공부하는 열혈 역사 연구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