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 학당

[비즈체크=박용설 역사 칼럼니스트] 신은 질투가 많은가보다.

인간이 뛰어난 재능으로 신의 영역을 넘본다고 느끼면 일찍 하늘로 데려간다.

모차르트, 에밀리 브론테, 스티브 잡스,등 수많은 천재들이 요절한 이유(?)이기도 하다.

라파엘로 산치오는 1483년 이탈리아 우르비노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의 삶은 처음부터 순탄치 않았다. 어머니가 라파엘로 8살 때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홀로 어린 아들을 키워야했다,

우르비노공국의 궁정 화가인 아버지는 어린 라파엘로를 맏길 사람이 없어 어쩔수 없이 데리고 출근하기 시작했다.

라파엘로는 아버지의 작업장에 널려있는 붓과 물감을 장난감처럼 접하였다.

하루종일 작업실 구석에서 아버지가 그림 그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미술을 익혔으며 이경험이 그의 천재성을 꽃피우는 밑거름이 되었다.

11살때쯤 아버지는 아들이 이미 자기 실력을 넘어섰다고 생각하였다.

출중한 라파엘로를 어떻게 하면 더욱 성장케 하여 당대 최고의 화가로 만들까하는 즐거운 고민에 빠진 아버지...,

그러나 갑자기 독감으로 세상을 떠난다.

성체논의

어린나이에 고아가된 라파엘로는 숙부의 손에 맡겨졌다.

숙부의 소개로 ‘페루지노’라는 당대 유명화가의 공방에 들어가 부드럽고 균형잡힌 화풍을 배우게 된다.

라파엘로는 스승의 기법을 빠르게 습득하는 것을 물론 독창적인 스타일로 승화 시키며 예술의 경지에 이른다.

페루지노는 라파엘로에게 더 가르칠것이 없다고 판단, 17세에 독립화가로 자립시킨다.

라파엘로가 본격적으로 빛을 발한 무대는 피렌체였다. 그곳은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같은 거장이 활동하던 도시로 당대 최고의 예술 중심지였다.

피렌체에서 라파엘로는 화려하게 등장한다.

그림 잘그리고, 얼굴도 잘생기고 성격과 매너까지 좋은, 말그대로 ‘만렙 캐릭터’였던 그는 르네상스시대의 완벽한 인플루언서였으며 특히 여성들에게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라파엘로의 자화상

라파엘로의 사교적 성격은 그의 작업속도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주변에서는 “연애에 빠져서 그림 그릴 시간이 줄어들까 걱정스럽다”며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심지어 교황도 “이사람은 연애 때문에 작업실에 좀처럼 머물지 않는다”며 한탄을 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인기좋은 라파엘로에게 질투심을 느낀 미켈란젤로는

“쟤는 내 아이디어를 훔쳐 가고 있어”라고 시기어린 농담을 했는데 라파엘로는 빙그레 웃으며 “훔친게 아니라 제가 더 잘해낸 것 뿐이에요..”라고 웃음으로 응수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교성이 뛰어난 라파엘로는 브라만테의 소개로 로마교황에게 초청되어 바티칸궁전의 벽화 ‘아테네학당’과 ‘성체의 논쟁’으로 단숨에 교황과 귀족들에게 실력을 인정받고 이후 수많은 대작들을 그려내며 르네상스의 거장으로 거듭난다.

어느날 교황에게 “로마에 집 하나 달라”고 애교스럽게 말했는데 “이보게 그림 좀 열심히 그리게...” 라며 로마중심가에 고급저택을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변용

그는 흔히 ‘우아함과 조화의 대가’라 불린다.

‘아테네학당’을 보면 캔버스안에 철학자와 과학자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이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하나의 드라마처럼 느껴진다. 조화롭고 완벽한 구도속에서 따뜻한 인간의 숨결을 표현하였다.

‘성체 논의’는 천국의 평화와 지상의 열띤 논쟁이 묘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라파엘로는 이 복잡한 주제를 아름다운 균형과 명확한 구도로 풀어내며 하늘과 땅의 대화를 조화롭게 그려 내었다. 신앙은 논쟁이 아니라 화합의 중심이라는 메시지를 전한 듯 하다.

마지막 유작인 ‘그리스도의 변용’은 상단의 예수를 성스럽게 표현, 공중에 떠있게 하고 하단에는 병든이를 고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간들의 군상이 펼쳐진다.

위는 밝고 평화로움, 아래는 혼란과 어두움을 극적인 대비로 표현했다. 이는 라파엘로가 인간의 감정과 고통을 깊이 이해 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작품은 라파엘로가 세상을 떠난 직후 공개 되었는데 ‘인간과 신성을 동시에 꿰뚫어본 예술적 유언’이라 불리웠다.

의자에 앉은 성모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의 강렬함과 다빈치의 신비로움을 절묘하게 결합해 르네상스 회화의 완성을 이룬 화가로 평가 받으며 19세기 까지도 가장 이상적인 미술로 평가 되었다.

라파엘로는 1520년 4월 6일 37세에 로마에서 요절하였는데 당시의 기록에는 갑작스런 열병으로 사망하였다고 전해진다.

열병의 원인은 확실치 않으나 과로와 폐렴,여성편력등이 거론된다.

라파엘로의 죽음은 예술계의 엄청난 손실을 주었으며 그의 재능이 끝났음을 안타까워 했다.

그는 살아생전 매우 좋아했던 판테온에 묻혔다.

“여기 라파엘로가 누워 있다. 그의 예술은 너무 완벽해서 자연조차 질투했지만, 그가 떠나자 자연도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멈추고 말았다.”라는 비문과 함께....

박용설 역사 칼럼니스트 finder5300@hanmail.net

금융회사에 30년간 근무하고 마라톤을 뛰고 있다. 로마사에 흠뻑 빠져 관련책을 섭렵하고 있으며 고대로마의 역사현장에 가서 배우기 위해 로마와 그리스등에서 직접 ‘한달살기’ 체험을 하면서 공부하는 열혈 역사 연구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