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체크=서동석 수행문화전문가] 누구나 존엄하게 살다가, 존엄하게 죽기를 바란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렇게 살다가 가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삶의 존엄은 돈, 권력, 명예 등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대로 세속적인 지위가 없는 사람들도 존엄하게 살 수 있지만, 대부분 그렇게 사는 법을 모르고 있다. 흔히 종교적인 사람들이 존엄할 것 같지만, 그들의 일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도 않다. 그것은 그들이 하는 종교적인 말과 달리 실제로 살아가는 방식은 세속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종교를 믿고 사는 것은 종교의 모태가 되는 성인(聖人)들의 거룩한 삶과 말씀 덕분이다.
종교적 가르침대로 따르고 살기에는 우리의 현실은 너무 팍팍했다. 일제강점기, 남북전쟁, 각종 혁명 등 시련의 가시밭길이 점철되어, 민초들의 삶은 존엄과는 거리가 멀었다. 모진 시련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산업사회를 선도한 기업인들과 많은 사람들이 노력해서,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다. 어떤 나라보다도 빠른 경제성장에는 일사불란한 사회의 위계질서가 한몫했다. 전통적으로 충효를 중시한 가치관은 계획경제의 시대에 잘 어울렸다. 그러나 점차 정보통신기술, 서비스 산업 등의 발달로 세상의 가치체계는 완전히 변했다. 경제역군들이 고생한 만큼 앞으로 대접을 받아야겠지만, 현실은 과거와는 확연히 다르다. 사회의 갈등과 불안도 점점 심화되고 있다.
예전에는 “노인 한 명이 임종하면,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는 말이 통용되던 시대였다. 하지만 지금은 AI로 인해 구세대가 이룩한 산업문명시대의 지식은 빠르게 가치를 잃어가고 있다. 문명전환이 급속도로 이루어지는 과도기에는 사회변화에 적응하기 힘들다. 특히 노인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냉혹한 현실이지만, 노인이 지속적으로 대접받을 수 있는 조건은 주변을 이롭게 하는 노인의 활동이 끊이지 않는 데 있다. 가정과 사회에서 노인의 역할이 사라지면, 작게는 가족의 부담이 되고, 크게는 전체 사회를 위태롭게 만든다. 사회의 안전망이 무너지고 있는 사례는 현대판 고려장이라고 할 수 있는 노인의 고독사에서 찾을 수 있다.
노인문제를 이대로 방치할 수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노인들은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보내며, 대책 없이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그나마 여성들은 상황이 좀 낫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노년에도 소일거리로 할 수 있는 일들이 많다. 가족과도 친화적이고, 다른 친구들과 삼삼오오 어울려서 서로 잘 지내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 반면에 남성 노인들은 경제력을 잃으면, 활력이 급격히 떨어진다. 그럼에도 남성 특유의 공격적 성향은 남아있고, 서열의식은 여성들에 비해 강하다. 이 때문에 가부장적인 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남성들은 주변에서 소외당하거나, 심지어 가족들로부터 버림을 받는 일도 적지 않다.
노인이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면서 사는 유일한 길은 건강을 유지하면서 적당한 일을 하는 것이다. 적당한 일은 경제활동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회적 봉사도 노년에 할 수 있는 좋은 일이다. 봉사를 통해 좋은 사람들과 교류하고, 건강한 기운을 주고받을 수 있다. 미국에서 경제활동과 더불어 사회봉사를 매우 성공적으로 해내고 있는 대표적인 노인으로 워런 버핏(Warren Buffett)을 얘기할 수 있다. 올해 94세를 맞이한 그는 아직도 현직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도, 절제된 삶을 통해 남는 이익을 사회에 많이 기부하고 있다.
버핏을 ‘오마하의 현인(Sage of Omaha)’이라고 사람들이 부르는 데는, 그가 정신적 스승으로 삼고 있는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의 영향이 크다. 동서양의 정신문화를 통섭한 에머슨에게서 그는 많은 영감을 받았다. 정도경영(正道經營)이란 측면에서, 그는 모든 기업가가 본받을 만한 큰 수행을 일상에서 실천하고 있다. 햄버거와 콜라를 좋아하는 식성을 갖고 있지만, 그가 아직도 건강을 유지하는 원천은 에머슨의 저작으로부터 배운 조화와 균형의 지혜에 있다.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삶의 지혜는 변화에 대처하는 능력이다. 1990년대 이후 우리 사회의 세태와 풍속은 크게 변하고 있지만, 노인들의 세계관은 별 변화가 없다. 세대 간의 가치관 차이가 크고 생산인구가 급격히 감소하는 상황에서는, 노인들은 스스로 자신을 돌보는 방법을 찾는 수밖에 없다. 노인세대가 추구하는 가치와 현실은 다르다. 따라서 세상을 양면적으로 바라보는 눈이 필요하다. 세상의 변화에 맞게 삶의 양극적 모순을 조율하는 수행문화가 노년기에는 더욱 절실한 이유다. 관념적인 수행문화 연구가 아닌, 실질적인 수행의 실천이 중요하다.
수행은 고정된 사고를 풀어주고 소통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늙는다는 것은 심신이 경화(硬化)되는 것을 의미한다. 몸이 굳어 가면, 마음의 문도 닫혀 간다. 수행을 통해 마음을 이완시키면, 몸도 한결 유연해진다. 나이가 늙어도 건강한 노인은 생각이 막혀 있지 않다. 노자는 “덕이 두터운 사람은 적자와 같다(含德之厚, 比於赤子).”고 했는데, 이 말씀은 노년기의 건강한 삶에도 적용된다. 각계의 원로들은 적자, 즉 갓난아기처럼 부드러운 태도로 사회의 변화를 수용하고, 노년의 성숙된 지혜로 세상과 통섭하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 균형조율의 수행문화가 정착되면, 사회의 갈등과 스트레스는 사라질 것이다. 수행을 일상화 하는 삶은 특히 노년기에 최고의 건강 비결이다.
웰다잉(Well-dying) 차원에서도, 수행문화는 노인에게 꼭 필요하다. 앞서 〈수행은 인생학이자 죽음학이다〉란 칼럼에서 밝혔듯이, 임종을 맞이하는 노인에게 지금의 장례문화는 존엄한 죽음을 담보할 수 없다. 그 원인은 주거형태와 관련이 높다. 도시에서 생활하는 비중이 높은 우리나라는 특히 아파트와 같은 집단거주 시설이 많다. 이런 주거 형태에서는 외부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치를 수밖에 없다. 사실상 객사(客死)라고 할 수 있다.
존엄한 임종의 기본 조건은 재택임종(在宅臨終)이다. 자택에서 임종을 맞이하려면, 심신이 건강할 때 수행에 관한 안목을 가지고 인생2막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 〈인구문제와 농촌문제의 근본 해법〉에서 제안했듯이, 생태환경이 좋은 전원지역에 인생 후반기를 위한 삶의 터전을 미리 마련해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점에서, 수행과 관련된 융합사업은 삶과 죽음의 상태를 개선할 뿐만 아니라, 도시와 농촌을 연결하면서 지방소멸, 인구감소 등을 해결하는 강력한 방안이 될 것이다.
수행문화전문가 = 서동석 박사 eastosuh@daum.net
고려대학교 대학원 영문학과를 졸업(문학박사)했고, 현재 에머슨하우스 교육연구소 소장이다. 서남대학교 영문학과 교수, (재)대상문화재단 이사 겸 동천불교문화재단 상임이사 겸 반야연구소 소장, 고려대학교, 광운대학교, 단국대학교 강사 등을 역임했다. AI시대 융합문명사회를 준비하는 차원에서 인간교육과 수행에 관한 집필과 연구개발을 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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