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체크=서동석 수행문화전문가] 인간의 삶은 복잡한 인연의 결과물이다. 그 중에서도 태어나는 순간 주어지는 삶의 환경은 일생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어떤 조건에서 태어날지 결정하고 세상에 나오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물론 종교적으로 보면, 현생의 환경을 선택해서 태어나는 신인(神人)들의 얘기가 나온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은 전생 인연의 결과로 현생의 상황이 결정된다고 한다. 여기서는 알 수 없는 전생의 인연을 제외하고, 지금 여기 현실의 삶에서 출발해서 우리의 운명을 성찰해보자.
나는 어린 시절부터 “나는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두고 고민했다. 그런 인연의 결과로 수행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꼭 수행이 아니더라도, 어떤 학문도 “인간이 하는 모든 연구는 인간에 관한 연구다.”라는 명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 대표적인 학문이 철학이다. 현대철학은 대부분 서양철학의 원리와 방법으로 인간의 존재와 운명을 연구하고 있다. 그러나 서양철학은 관념과 표현의 성(城) 안에서 세상 밖을 바라보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철학은 개념의 틀 속에서 본질인 이데아를 꿈꾼다. 그럼에도 플라톤은 이데아의 모방으로서 철학의 의미를 중시했다.
서양철학의 한계를 지적한 사람은 다름 아닌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다. 그는 철학은 ‘모방의 모방’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철학은 관념적인 표현으로 이데아의 투영에 불과한 현실세계의 실체를 밝히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이 아무리 이데아를 잘 표현해도, 진리에서 두 단계 떨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 오히려 인간의 감정을 다루는 문학이 철학보다 세상의 실체적 진실을 보다 잘 표현할 뿐만 아니라 삶을 고양시킬 수 있다고, 그는 보았다. 문학은 인생의 비극을 통해 감정의 카타르시스(정화)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그는 문학을 철학보다 한수 높게 평가했다.
인생은 사실 기쁨보다는 슬프고 괴로운 일이 더 많다. 아마도 문인(文人)들은 인간의 감정을 가장 치열하게 들여다보고 표현하는 사람들일 게다. 최근에 노벨평화상을 탄 한강도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환경 조건에서 몸부림치는 인간의 삶을 작품 속에 진솔하게 담아냈다. 스웨덴 한림원에서 수상 이유를 설명했듯이, 그녀는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서 인간이 처한 삶의 연약함을 시적(詩的)으로 드러낸 강렬한 산문’으로 우리의 삶을 보다 예술적으로 승화시켰다. 그녀의 작품은 우리의 삶이 그 어떤 역사적 사실보다 소중하다는 사실을 일깨우고 있다. 유럽인들이 공감한 것은 비참한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강렬하게 대비되는 삶의 소중한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그녀의 작품을 통해 감정이 정화되고, 존재의 순수성이 회복되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인간의 원초적 심성을 보여주는 다른 예로 마광수의 작품세계를 얘기할 수 있다. 그는 외설 시비가 있던 소설도 썼지만, 누구보다도 솔직하게 심사(心事)를 표현한 시인이기도 했다. 그는 〈효도에〉라는 시에서 어머니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이 처한 운명을 받아들이고 살 수밖에 없는 삶에 대해 도발적으로 말한다. “어머니, 전 효도라는 말이 싫어요,/ 제가 태어나고 싶어서 나왔나요? 어머니가 저를 낳으시고 싶어서 낳으셨나요.” 그러나 결론에서는 반대로 운명을 받아들이고, 모든 생명을 감싸 안는 원초적 사랑으로 의식이 확장되고 있다. “모든 동정으로, 연민으로/ 이 세상 모든 살아가는 생명들에 대한 애정으로 진정 어머닐 사랑해요, 사랑해요.” 어머니와 자식 간의 조건 없는 사랑이 세상으로 확대되면, 모든 생명을 품어 안고 경계를 초월하는 인류애가 된다.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은 문인과 철학자의 중간 어느 쯤에서, 객관적으로 운명을 바라보았다. 입지전적인 위인들의 삶이 대개 그렇듯이, 에머슨도 수많은 인생의 풍파를 겪으며, 불행과 행복이 인생에 중첩되어 있음을 통감했다. 그는 슬픔이나 기쁨과 같은 감정으로는 자신의 운명을 극복할 수 없었다. 반대로 철학적 사변으로도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관념적 사고와 감정의 표현이 존재의 실체를 온전히 드러낼 수 없다는 자각에서, 새로운 인생은 시작된다.
에머슨은 ‘우리를 제한하는 모든 것’을 운명이라고 부른다. 삶의 환경이라고 할 수 있는 운명을 우리는 수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우리는 운명의 압제적 환경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에머슨이 선택한 길은 실용주의적 중도의 길이다. 운명의 수용과 초월이라는 양면적 노력을 통해, 우리는 운명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운명을 당당히 마주해서, 인생의 혁명적 변화들을 이끌어내는 자만이 성공할 수 있다.
미국은 혁명적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이 건설한 나라다. 미국의 정신을 정립한 에머슨이 추구한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은 단순히 물질적인 성공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가 주장한 성공은 동서양의 종교사상을 하나로 관통하는 인류도덕과 자유의 정신을 깨닫고, 도덕정신을 자신의 인연에 맞게 세상에 구현하는 것이다. 현상의 물질은 수단이고, 목적은 진리의 정신이다. 따라서 수단을 실용적으로 활용해서 진리의 눈을 뜬 자가 운명의 한계를 넘어 참으로 성공한 사람이다.
동양은 전통적으로 천지인(天地人)의 3대 요소가 어떤 인과(因果)로 결합하느냐에 따라 개인의 운명을 논했다. 삶의 인과는 내연(內緣)과 외연(外緣)으로 나눌 수 있다. 내연은 태생적으로 품고 있는 개인의 내면적 인연사를 말하고, 외연은 살아가면서 접하게 되는 외부적 인연사를 뜻한다. 양자역학에 의해 밝혀졌듯이, 모든 인연의 결과물은 보는 관점에 따라 변한다. 천지인의 내연과 외연도 세상을 구성하는 양극적 요소들을 대하는 마음의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천지인은 고정된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유동적인 관계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연을 대하는 마음은 근원적으로 운명을 주재한다. 그러므로 인간에 대한 이해와 진리에 대한 성찰을 통해 세상을 바르게 보는 눈을 뜨는 것이 운명을 극복하는 핵심이다. 근원으로 돌아갈 때는 마음을 비워야 하지만, 세상을 주도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마음을 도리에 맞게 잘 써야 한다. 무심(無心)과 유심(有心)을 상황에 맞게 균형 있게 쓰는 자는 진리와 현상 양면에서 성공적이고 멋진 삶을 영위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안과 밖의 양면에서 자기혁신과 더불어 사회공동체를 아우르는 노력을 동시에 기울일 필요가 있다.
수행문화전문가 = 서동석 박사 eastosuh@daum.net
고려대학교 대학원 영문학과를 졸업(문학박사)했고, 현재 에머슨하우스 교육연구소 소장이다. 서남대학교 영문학과 교수, (재)대상문화재단 이사 겸 동천불교문화재단 상임이사 겸 반야연구소 소장, 고려대학교, 광운대학교, 단국대학교 강사 등을 역임했다. AI시대 융합문명사회를 준비하는 차원에서 인간교육과 수행에 관한 집필과 연구개발을 주로 하고 있다.
저작권자 ⓒ 비즈체크,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