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체크=박용설 역사 칼럼니스트] “일본 아내에게 꼭 가야 합니다. 애들도 아직 어리구요....” 이승만 정권시절 일반 백성이 해외가는 건 하늘에서 별따기 였다. 아니 갈수가 없었다.
이중섭은 외무부 여권담당자에게 매달려 통사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답은 언제나 한결 같은 “NO!”였다.

그의 삶은 눈물이었다.
그 눈물은 물감이 되어 캔버스로 번져갔고 세상을 감동시키는 그림이 되었다.
‘이중섭’ 그는 한국 근대미술사의 기념비이자 불운한 천재였다.
그리고 한여인을 죽도록 사랑했던 사나이였다.
이중섭은 평안남도 평원에서 부농이자 지주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외조부는 서북농공 은행장으로 외가 역시 엄청난 부자 였다.
그는 어린시절부터 그림에 탁월한 소질을 보였다. 평양 오산학교에서 입학, 미국 예일대 출신 미술선생 임용연을 만나 그림실력이 나래를 편다. 1932년 중등부 미술전람회에서 입상 한후 그림을 전공하러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일본 도쿄제국미술대학 서양학과에 재학중 고루한 학풍이 맞지 않아 중퇴, 보수적 교육에 반기를 든 자유롭고 남녀 구별 없는 분카가쿠인(文化學圓)으로 전학, 자유분방한 그의 성격과 잘 맞았다.
잘 생겼지, 돈도 잘 쓰지, 그림도 잘 그리지, 운동도 잘 하지, 부자집 도련님 이중섭은 전학 하지마자 학교의 인기 스타가 되었다. 특히 여학생들에게 인기는 요즘 BTS를 능가 하였다.
어느날 체육대회중 발가락을 다친 여학생을 붕대를 감아주며 둘은 운명의 만남이 된다.
이름은 ‘야마모토 마사코’ 그녀의 부친은 미쓰이상사 고위 임원으로 부유한 집안의 딸이었다.
그때부터 둘은 항상 붙어 다니며 그림 공부도 함께, 식사도 함께 하는 바늘과 실이 되었다.
그리고 1945년 5월 20일 원산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마사코는 남쪽에서 온 덕있는 여인 ‘이남덕’이란 이름으로 지어주며 신혼생활을 시작한다.
부유한 집안에서 부족한 것 없이 아이도 낳고 화가 활동도 하며 행복하게 지낸다.
45년 8월15일 해방이 된다. 기쁨도 잠시 북쪽은 공산당의 본색이 드러 나기 시작한다.
화가들은 강제로 동원되어 선동 포스터등 공산당이 필요한것만 그릴 것을 강요 당한다.
공산당에 환멸을 느낀 이중섭이 월남을 고민하고 있을 때 6.25가 터진다.
북진하던 유엔군이 후퇴할 때 부랴부랴 간신히 식구들만 챙겨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갑자기 아무것도 챙기지 못한채 완전 빈털터리로 남한땅에 온 것이다.
부산을 거쳐 도착한 제주도... 물설고 낮설은 곳에서 그들은 힘겹게 살아간다.
미군이 나눠주는 구호물자로 근근히 연명하는,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고생이었다.
이중섭 작품은 미술시장이 전무했던 전쟁통에 팔릴수가 없었다.
아침 먹으면 점심 걱정, 또 저녁 걱정, 하루 하루가 끼니와의 전쟁 이었다
가난은 예술보다 날카로웠고 그들의 삶을 갉아 먹어갔다.
견딜수 없는 이중섭은 어쩔수 없이 가족을 일본 처가에 보내는 결단을 내린다.
그것은 처절한 절망 이었다. 가장으로서 더 이상 가족을 지킬수 없다는 자괴감,
사랑하는 아내와 이별,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식들과의 생이별.... 그렇게 멀어져 갔다.
방황하는 이중섭은 닥치는대로 미친 듯이 그림을 그렸다. 달걀껍데기에, 담배종이에, 닥종이에.... 가족에 대한 그리움에 가슴은 새카맣게 타들어가고, 그 애절함은 붓을 움직여 그림으로 향했다.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는 그림에 글씨 몇자가 다였다, 그것 말고는 해줄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었다.
가족이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외무부에 여러번 여권을 신청해 보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일본행 여권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옆에서 지켜 보기가 너무 안타까웠던 지인의 알선으로 화물선에 몰래 승선하여 일본 밀항에 성공한다.
꿈에 그리던 가족과 재회 하였지만 불법체류자 신분으로는 화가 활동이 어렵고 그외 여러 사정으로 일본에 더 이상 머물수가 없었다.
서울 마포의 허름한 여관방으로 돌아온 그는 얼굴을 감싸쥐고 통곡 한다.
이젠 어찌한단 말이냐.... 가족을 위해 할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는 신세를 한탄 한다.
어쩌다 아내에게서 오는 편지에서, 아내의 체취라도 느낄수 있을까?, 혹 아이 냄새라도 날까?,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정신없이 냄새를 맡아 본다......
그래도 편지가 온날이면 방에 온기가 도는 듯 기분이 좋아져 편지를 끌어앉고 가족을 그리며 잠이 든다.
그 방은 캔버스였고 아뜰리에였다. 그러나 가족을 만날 수 없다는 절망감에 우울증과 영양실조, 외로움에 서서히 나락으로 떨어져 갔다.
1956년. 그의 나이 39세, 그는 조용히 세상과 하직했다.
그가 남긴 그림은 시간이 지나며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소”는 고통속에서 절규하였고
“아이들”은 잃어버린 아들을 그리워 했다.
“물고기”는 일본땅의 가족에게 헤엄쳐 갔다.
그의 그림은 고백이자, 한 가장의 절규였다.
둘 사이에 바다가 있었고 그 바다는 통한과 슬픔으로 메워졌다.
그 바다를 건넌 것은 이중섭이 아닌 그의 그림이었다.
사랑은 애절한 사연만 남긴 채 영원으로 사라져 갔다.
그리고 사후 그의 그림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아 한 점에 수억원, 수십억원.....
그는 살아서는 한끼 걱정을 했고, 죽어서는 한국 미술사의 전설이 되었다.
박용설 역사 칼럼니스트 finder5300@hanmail.net
금융회사에 30년간 근무하고 마라톤을 뛰고 있다.
로마사에 흠뻑 빠져 관련책을 섭렵하고 있으며 고대로마의 역사현장에 가서 배우기 위해 로마와 그리스등에서 직접 ‘한달살기’ 체험을 하면서 공부하는 열혈 역사 연구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