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리자
[비즈체크=박용설 역사칼럼니스트] 동서양을 통털어 가장 유명한 그림을 꼽으라면 대부분 모나리자를 떠올릴 것이다.
그 알듯 말듯한 신비로운 미소와 몽환적 분위기는 수세기동안 보는이들을 매료시켜 왔다.
이 작품은 1503년경에 그려졌으며 모델은 피렌체 상인 ‘프란치스코 델 지오콘도’의 아내
‘리사 게라르디니’로 알려져 있다.
모나리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그녀의 미소이다.
이 미소는 관찰자의 시선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어 마치 그녀가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다빈치는 스투마토 기법을 사용하여 부드러운 윤곽을 만들고 빛과 그림자를 통해 입체감을 표현하여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단순한 초상화를 넘어 인간의 내면과 감정을 탐구하는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인체 해부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인물의 표정을 정교하게 묘사했는데 이는 그의 예술적 천재성을 잘 나타낸다.
모나리자는 단순한 미술작품이 아닌 인류의 문화와 감성을 담고 있는 상직적 존재이고, 그녀의 미소는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며 예술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느끼게 해준다.
최후의 만찬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452년 4월15일 이탈리아 빈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유한 귀족으로 피렌체에서 성공한 공증인, 어머니는 신분이 낮은 농민 여성사이에 태어났다. 둘은 결혼관계가 아니므로 사생아(혼외자) 였다.
당시 사생아는 아버지 유산도 받을 수 없고 대학도 입학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 가업을 이어갈 의무가 없으므로 다빈치는 자유롭게 다른 분야를 탐구 할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명석했던 다빈치는 수학, 물리, 수사학등을 독학으로 공부를 하다가 14세가 되자 피렌체에 있는“안드레아 베로키오”라는 유명한 화가이자 조각가의 공방에 들어가 그림,조각,금속세공을 배우기 시작했다. 몇년후 공방에서 다빈치는 그림으로 단연 두곽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어느날 다빈치가 그린 ‘천사의 얼굴’을 본 스승 베로키오는 다빈치의 그림이 너무 뛰어나서, 그 후로 주문받은 그림의 기초는 베로키오가 그리고 나머지는 다빈치가 모두 완성하게 했으며 스승은 조각에만 전념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비트루비우적 인간
“다빈치는 과학자이자 발명가였으며, 해부학자였고 군사전략가였으며, 조각가이자 건축가였고.심지어 음악도 했다”
어느 한분야에서만 유명해지기도 어려운데 그는 모든 분야에서 빛을 발했다. 다빈치는 인간이 얼마나 다재다능할수 있는지를 보여준 최고의 사례였다.
다빈치는 세상의 모든일에 호기심을 가졌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스케치북에 기록 하였다.
지금도 7,000페이지 이상 남아 있는데 우리가 상상 하지못할 정도의 아이디어가 가득하다.
비행기, 헬리콥터, 탱크, 로봇등 헤아릴수없이 많은 공학적 설계가 넘쳐 나는데 당시의 과학기술 수준으로는 구현할수 없는게 대부분이 었다. 하지만 400~500년후 현대 헬리콥터의 원조가 되었고, 해부학은 현대의학발전에 기여를 하였다.
다빈치의 스케치
“모든 것을 의심하라.”
“세상의 원리를 이해하라.”
“배움을 멈추지 마라.”
그가 남긴 스케치와 연구들은 여전히 현대 과학자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그가 보여준 지적호기심과 끝없는 탐구정신은 오늘날에도 우리가 본받아야할 중요한 가치다.
다빈치는 완벽주의자로 평생 독신이었으며 그림 그리는 속도가 매우 느리고 미완성이 많아 후원 받기가 어려웠다. 이런 이유로 궁핍하게 이탈리아 곳곳을 떠돌며 살다보니 남겨진 작품도 10여점에 불과하다.
예술가들은 작품을 팔거나 귀족들로부터 후원을 받아 생활하던 시대였는데 다빈치는 그 시대에 맞지않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다행스럽게 말년에 프랑스왕에게 후원을 받아 프랑스로 이주, ‘클루 루세성’에서 여생을 보내게 된다. 프랑스왕은 다빈치를 매우 존경하였으며 가족처럼 대해 주었다고 한다.
박용설 역사 칼럼니스트 finder5300@hanmail.net
금융회사에 30년간 근무하고 마라톤을 뛰고 있다. 로마사에 흠뻑 빠져 관련책을 섭렵하고 있으며 고대로마의 역사현장에 가서 배우기 위해 로마와 그리스등에서 직접 ‘한달살기’ 체험을 하면서 공부하는 열혈 역사 연구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