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체크=박용설 역사칼럼니스트] 새벽녘 황룡사로 향하는 여인들 발걸음이 바쁘다.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귀부인부터 소박한 차림의 여인들까지 그들의 마음은 오직 하나, 자식낳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다.
절안에 들어서면 향을 피우고 108배를 올린후 무릎 꿇고 앉아 “부처님 제발 자식하나만......”
몇 달뒤 임신소식이 들리면 집안은 축제분위기로 가득찼다.
스님은 축하의 의미로 부적을 써주고 아기가 무탈하게 태어나길 기원하는 독경소리가 울려 퍼졌다.
신라의 역사는 BC57~AD935년까지 약 천년을 유지하였다.
불교가 국교인 까닭에 황룡사를 비롯 헤아릴수 없을 만큼 많은 불교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그중 가장 불교유적이 많은곳은 불국사, 황룡사도 아닌 바로 경주 남산이다.
신라 왕궁 남쪽에 있어 그냥 남산이다.
경주 한 달 살기 때 우연히 들른 남산, 수없이 많은 불교유적에 호기심이 발동하여 십여회에 걸쳐 남산 전지역을 답사하였다.
신라초기에 왕궁과 백성들 주거지 가까운쪽 부터 시작하여 점점 먼곳으로 조각되어 갔다.
즉 신라 초기불교문화부터 말기불교문화까지 순서대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산속 불교박물관이란 얘기다.
남산에 신라 1000년동안 절과 불상,탑,부조등을 만들다보니 대부분 바위에는 부조또는 불상으로 채워졌는데 최고 부자는 절을 짓고 중간부자는 부처나 탑을 세우고 서민들은 부조를 만들고 빈자는 본인이 직접 정이나 끌로 부조를 했다.
불심이 대단한 백성이었다.
중세유럽에서 부자들이 천당가려고 성당을 지어 바친것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남산 어딜가나 불상과 탑이 지천이고 바위에는 어김없이 흔적을 남겼으니 비어있는 바위가 거의 없을 정도다.
산 전체에 수많은 절을 짓고 조각하여 등산객이 남산에서 쉴수 있는곳은 오직 절터뿐이란 말이 있을 정도다.
신라전성기때 남산에 약150곳의 절이 있었고 불상,탑,부조는 절보다 더많이 분포되어 있었다.
국보급에 속하는 수작도 있고 수수한 작품도 많아 자기 형편에 맞게 불심을 표현 했을 것이다.
한마디로 온백성이 불자였던 것이다.
남산에는 불두가 온전한 불상을 찾아보기 어려운데 여러 원인중 조선시대 배불정책으로 유교쟁이들이 대부분 피괴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위사진 불상 가사에 새겨진 고급진 문양을 보면 당대 최고의 조각가들이 혼을 불어넣은 듯 정교하고 아름답다.
조각된 양식으로 봐서 석굴암을 만든 김대성과 같은 공방출신(?) 아닐까 추정해 보는데 온전했으면 박물관에 고이 모셔졌을 것인데... 너무 안타까워 두고 두고 생각난다.
신전들을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가 파괴했듯 우리도 똑같은 이유로 유물 파괴가 자행되었다.
역사는 만약이 없다지만.....
“진정 아쉽다!”
실선으로 조각한 것을 선각(線刻) 또는 선조(線彫)라 하는데 저렴한 비용으로 할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조각가를 고용하기 어려운 형편의 백성이 직접 정과 끌로 조각하여 정교하진 못하지만 투박하게 진심 어린 불심을 표현한 것이다.
세월이 흘러 잘생긴 불상은 대부분 훼손되고 보잘 것 없는 부조는 지금까지 잘 보존되고 있어 인생사 최선(?)은 무었인지 생각이 들게 한다.
“경주에 가서 남산을 못 보았으면 경주는 반도 못본 것이다.”
박용설 역사 칼럼니스트 finder5300@hanmail.net
금융회사에 30년간 근무하고 마라톤을 뛰고 있다.
로마사에 흠뻑 빠져 관련책을 섭렵하고 있으며 고대로마의 역사현장에 가서 배우기 위해 로마와 그리스등에서 직접 ‘한달살기’ 체험을 하면서 공부하는 열혈 역사 연구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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