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머슨과 융합문명

수행문화를 통해 인간의 정신을 깨워야 한다.

비즈체크 승인 2024.04.25 14:12 의견 1

동서문명은 끊임없이 교류하면서 발전해왔다. 물론 끊임없다는 말에는 상대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고대에는 무역, 종교, 정치 등의 특수한 목적에서 간헐적으로 때로는 정기적으로 교류가 이루어졌다. 본격적인 동서의 만남은 18세기 산업혁명으로 에너지 효율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다양한 이동수단들이 개발되면서부터다. 인류 문명사에서 동서의 문명이 하나로 만나 거대한 문명의 원환을 이루었다고 전문가들이 평가하는 것은 미국의 출현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미국이 영국의 청교도가 신대륙으로 건너가 건설한 나라로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고학적 연구에 따르면, 이미 4만 년 전에 아시아인들이 베링해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갔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15세기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을 때, 북아메리카에만 천만 명의 원주민들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영국인들이 신대륙으로 이주하던 17세기 중반 무렵에는 네덜란드인, 프랑스인, 독일인 등 이미 도처의 유럽인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혹은 개인과 집단의 새로운 희망을 찾아 그곳에 정착하고 있었다.

미국은 태생적으로 동서의 문명이 하나로 통합할 수밖에 없는 상황과 구조를 지니고 탄생했다. 그러나 소위 와스프(WASP), 즉 ‘백인 앵글로색슨족 개신교도(White Anglo-Saxon Protestant)’가 정치적 주류를 형성하면서, 미국의 융합문명이 왜곡되었다. 19세기 초까지 미국의 융합문명을 제대로 정립한 사상가가 없었다. 미국의 정신을 제대로 세운 사람은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이다. 에머슨은 서양의 물질문명과 동양의 정신문명을 하나로 통합한 초절주의를 창시했고, 그의 영향을 받은 문인들이 미국의 문예부흥을 주도했다.

현재의 미국은 다양성과 통일성의 모순을 하나로 통합한 에머슨의 정신에서 기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 세계의 다양한 민족, 종교, 문화가 용해되어 오늘의 미국을 만든 원동력이 바로 에머슨의 정신에서 비롯되었다. 현재의 미국을 최첨단으로 이끈 워렌 버핏,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일론 머스크 등 각계의 주요 지도자들이 에머슨의 정신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 에머슨의 정신이 바로 미국의 정신이라고 하는 이유다.

이 점에서 보면, 미국을 기독교 국가로 보는 시각은 잘못된 관점이다. 미국은 모든 종교를 아우르는 보편정신으로 하나가 된 나라다. 물론 시대에 따라 정치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보편정신이 왜곡된 것은 사실이다. 지금도 그러한 일면이 많다. 하지만 미국을 현재의 거대 국가로 만든 원동력이 모순을 아우르는 통합정신에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만약 미국이 에머슨이 제시한 포용의 정신을 상실한다면, 미국은 분열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에머슨의 융합정신은 생태적 통찰에서 비롯된다. 에머슨이 생존한 19세기는 최초의 대륙횡단철도가 준공된 때이기도 하다. 물질문명이 급속도로 전파될 길이 열리자, 자연과 인간의 생태적 균형이 급속도로 깨졌다. 물질주의는 인간을 본격적으로 물화(物化)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그의 심정은 〈송시(Ode)〉에서 극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물질이 말안장에 앉아,/ 인간을 몰고 있다.” 생태계 파괴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지나친 물질주의적 욕구의 산물이다. 소유 욕구가 결국 인간 스스로를 물질의 노예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인류의 상황이 보다 심각하다. 물질문명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AI가 인간을 지배할 수 있는 특이점시대가 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인간은 정신을 못 차린 채 물질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서로 싸우고 있다. 인간이 진정으로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물질 중심의 이분법적 관념에서 벗어나는 길밖에 없다. 내가 《융합창의력과 인간교육》에서 생태중심의 직관적 정신 회복을 주장하는 이유다. 수행문화를 통해 인간의 정신을 깨울 필요성이 절실하다. 진정한 융합문명은 도덕 정신을 중심으로 물질적 융합을 이루는 데 달려 있다.

서동석 박사(eastosuh@daum.net)

수행문화 전문가인 서동석 박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영문학과를 졸업(문학박사)했고, 현재 에머슨하우스 교육연구소 소장이다. 서남대학교 영문학과 교수, (재)대상문화재단 이사 겸 동천불교문화재단 상임이사 겸 반야연구소 소장, 고려대학교, 광운대학교, 단국대학교 강사 등을 역임했다. AI시대 융합문명사회를 준비하는 차원에서 인간교육과 수행에 관한 집필과 연구를 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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